미루고 나서 자책했는데, 왜 다음 날 또 미룰까
우리는 미루는 순간에도 사실 뭔가를 얻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잠깐의 편안함 때문에, 다음 날도 같은 일이 반복되는 걸까요?
그렇다면 미룬 뒤 필요한 건 더 강한 다짐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자꾸 미룹니다. 보고서를 열어야 하는데 폰을 보고, 공부를 시작해야 하는데 갑자기 다른 일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다 밤이 되면 생각합니다.
‘내일은 진짜 해야지.’
그리고 한마디쯤 더 붙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르지?’
그런데 미루기를 연구한 심리학자들은 이 행동을 단순한 게으름만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해야 할 일 자체보다, 그 일을 떠올렸을 때 어떤 기분이 드느냐일 수 있습니다.

미루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피하고 있을까
미루는 동안 피하는 건 일 자체보다, 그 일을 떠올릴 때 함께 올라오는 막막함·걱정·피곤함 같은 불편한 기분일 수 있습니다.
보고서를 떠올리면 보고서만 생각나는 게 아닙니다.
‘이걸 언제 다 하지?’
‘잘 못하면 어떡하지?’
‘어디서부터 시작하지?’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이런 생각과 감정도 같이 올라옵니다.
평소에는 이것들을 하나씩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냥 통째로 ‘하기 싫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잠깐 자세히 보면 다릅니다.
막막한 걸 수도 있고, 잘 못할까 봐 걱정되는 걸 수도 있고, 일이 너무 크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습니다.
이때 바로 해결하려고 하기보다 한 번 알아차려볼 수 있습니다.
‘아, 지금 일 자체만 피하고 있는 건 아니구나.’
미루기를 연구한 심리학자 Sirois와 Pychyl은 미루기를 단순한 시간 관리 실패가 아니라, 당장의 불편한 기분을 조절하려는 행동과 연결해 설명했습니다.
해야 할 일을 떠올렸더니 불편해집니다.
그래서 폰을 봅니다. 다른 일을 합니다. 영상을 하나 봅니다.
그러면 일은 그대로인데 기분은 잠깐 나아집니다.
여기서 미루기가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우리는 미루는 순간에도 사실 뭔가를 얻고 있습니다.
잠깐의 편안함입니다.
문제는 그 편안함이 공짜가 아니라는 겁니다.
오늘 오후의 내가 피한 보고서는 오늘 밤의 나에게 넘어갑니다. 오늘의 내가 피한 공부는 시험 전날의 나에게 넘어갑니다.
현재의 내가 불편함을 피한 대가를 미래의 내가 치르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간단해 보입니다.
자신을 좀 더 세게 몰아붙이면 되지 않을까요.
‘정신 차려.’
‘왜 또 미뤘어?’
‘이번에는 진짜 해야 해.’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실험이 하나 나옵니다.
시험을 못 본 학생들에게 무슨 말을 읽게 했을까
2012년 버클리 대학교 실험에서 시험을 못 본 대학생들 중 한 집단은 「혼자만 그런 게 아니다, 흔한 일이다, 너무 몰아붙이지 말라」는 취지의 짧은 문구를 읽었습니다.
UC Berkeley의 Juliana Breines와 Serena Chen은 실패 뒤 자신을 대하는 방식이 다음 행동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실험했습니다.
한 실험에서는 대학생 86명이 먼저 꽤 어려운 단어 시험을 봤습니다. 평균 점수는 10점 만점에 약 4점이었습니다.
그 뒤 학생들은 다음 시험에 나올 단어를 원하는 만큼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연구진은 이 공부 시간을 측정했습니다.
그전에 한 집단은 이런 취지의 문장을 읽었습니다.
방금 시험이 어려웠다면 혼자만 그런 게 아닙니다. 이런 시험을 어려워하는 학생은 흔합니다. 결과가 마음에 걸린다면 자신을 너무 몰아붙이지 마세요.
흥미로운 건 그 안에 “다음 시험을 더 열심히 공부하세요”라는 말이 한 번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다른 집단은 별도의 문구를 읽지 않았고, 또 다른 집단은 “버클리에 들어왔다는 건 당신이 똑똑하다는 뜻”이라는 식의 자기존중감을 높이는 문구를 읽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자기연민 문구를 읽은 학생들은 다음 시험을 준비하는 데 평균 약 5분을 썼습니다.
아무 문구도 읽지 않은 학생들은 약 3분 20초를 썼습니다.
자기존중감 문구를 읽은 학생들은 약 3분 50초였습니다.
그 문구는 공부하라고 등 떠미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 말라”는 말을 읽은 학생들이 오히려 더 오래 공부했습니다.
다만 다음 시험 점수까지 달라지지는 않았고, 잰 것도 미루기가 아니라 공부 시간이었습니다. 「똑똑하다」 문구를 읽은 집단과의 차이도 뚜렷하다고 하기엔 작았습니다. Breines & Chen,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Bulletin, 2012.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왜 그랬을까요.
실패를 인정하는 것과 자신을 공격하는 것은 다르다
미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일어난 일을 확인하는 것이고, 미룬 자신을 평가하는 것은 그 일을 근거로 나를 깎아내리는 것이라 같은 일이 아닙니다.
‘오늘 또 미뤘다.’
와
‘나는 왜 이렇게 의지가 약하지.’
는 전혀 다른 문장입니다.
앞의 문장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합니다.
뒤의 문장은 그 일을 근거로 나 자신을 평가합니다.
만약 처음부터 우리가 불편한 기분을 피하려고 일을 미뤘다면, 여기에 자책까지 더하면 불편함이 하나 더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미룬 걸 알아차린 순간에는 굳이 바로 자신을 분석하거나 혼낼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또 미뤘네.’
일단 여기에서 멈출 수 있습니다.
없던 일로 만들 필요도 없고, 괜찮았다고 합리화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 하나 남습니다.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고 해서 내일 자동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는 건 아닙니다.
그럼 다음 행동은 어떻게 정해야 할까요.
「내일 해야지」에는 빠진 게 하나 있다
「내일 해야지」에는 무엇을 할지는 있지만 언제 시작할지가 빠져 있어서, 다음 날이 와도 시작할 신호가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계획합니다.
‘내일 보고서를 해야지.’
‘내일부터 공부해야지.’
‘이번엔 꼭 시작해야지.’
문제는 무엇을 할지는 정했는데, 언제 시작할지는 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에는 바쁘고, 점심을 먹으면 좀 쉬고 싶고, 오후에는 다른 일이 생깁니다.
그러다 밤이 되면 다시 말합니다.
‘내일은 진짜 해야지.’
심리학에서는 이런 문제를 다루는 방법 중 하나로 ‘실행 의도(implementation intention)’가 연구돼 왔습니다.
방식은 단순합니다.
‘보고서를 해야지.’
보다
‘내일 저녁 8시가 되면 보고서 파일을 연다.’
처럼 상황과 행동을 미리 연결합니다.
Gollwitzer와 Sheeran이 94개의 독립된 검증을 종합한 메타분석에서는 이런 실행 의도가 목표를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데 전반적으로 의미 있는 효과를 보였습니다.
두 문장의 차이는 작아 보입니다.
하지만 ‘해야지’는 내일의 내가 다시 결심해야 합니다.
반면 ‘8시가 되면 파일을 연다’에는 행동을 시작할 신호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시작을 크게 잡을 이유도 없습니다.
‘두 시간 집중해서 끝낸다.’
대신
‘파일을 연다.’
정도여도 됩니다.
끝내는 건 그다음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늘 또 미뤘다면
오늘 또 미뤘다면 자책 대신 세 가지를 해 볼 수 있습니다. 막막했는지, 잘 못할까 봐 걱정됐는지처럼 무엇이 불편했는지 한 번 보고, 「오늘 또 미뤘네」라는 사실에서 멈추고, 「내일 저녁 8시가 되면 파일을 연다」처럼 시작할 순간 하나를 정합니다.
오늘 본 연구들은 하나의 ‘미루기 해결 공식’을 시험한 연구들이 아닙니다.
미루기와 감정 조절을 다룬 연구, 실패 후 자기연민을 다룬 실험, 실행 의도를 다룬 연구가 각각 따로 있습니다.
그래도 세 연구를 함께 놓고 보면 한 가지 방향은 보입니다.
오늘 또 미뤘다고 해서 곧바로
‘나는 왜 이 모양이지.’
라고 자신을 몰아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먼저 뭐가 불편했는지 한 번 봅니다.
시작하는 게 막막했는지, 잘 못할까 봐 걱정됐는지, 일이 너무 커 보였는지.
그리고 사실만 남깁니다.
‘오늘 또 미뤘네.’
그다음 거창한 다짐 대신 시작할 순간 하나를 정합니다.
‘내일 저녁 8시가 되면 파일을 연다.’
미루기를 한 번에 없애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연구들이 보여주는 건 꽤 흥미롭습니다.
자책을 더하는 것보다, 지금 무엇을 피하고 있는지 보고, 실패를 필요 이상으로 키우지 않고, 다음 행동을 구체적으로 만드는 것.
오늘 밤에는 그 정도면 충분할지도 모릅니다.
정리
미루기는 게으름만으로 설명되지 않고, 하기 싫은 일을 떠올릴 때 생기는 불편한 기분을 잠깐 피하는 행동으로 설명되며, 그 대가는 나중의 자신이 치릅니다(Sirois & Pychyl, 2013). 2012년 버클리 대학교 실험에서는 시험을 못 본 직후 「혼자만 그런 게 아니다, 흔한 일이다, 너무 몰아붙이지 말라」는 자기연민 문구를 읽은 대학생들이 아무 문구도 읽지 않은 학생들보다 다음 시험 공부를 더 오래 했습니다. 다만 버클리 실험이 잰 것은 공부 시간이었고, 다음 시험 점수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내일 해야지」 대신 「내일 저녁 8시가 되면 파일을 연다」처럼 시작할 순간과 행동을 미리 정해 두는 실행 의도는 94개 검증을 모은 메타분석에서 목표를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데 중간 이상의 효과를 보였습니다(Gollwitzer & Sheeran,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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